
나를 죽이는 건 언제나 나였다.
그동안 내가 어떤 말을 주로 했는지 떠올렸다. 매사에 왜 그리 불만이 많은지, 세상을 보는 시선이 45도 각도로 삐딱하기만 했다. 내 마음엔 자기 비하와 열등감이 고봉밥처럼 쌓여 있었다.
만약 이런 말들이 아닌, 예쁘고 좋은 말들을 내면에 담았더라면 달라졌을까.
아무렇지 않게 했던 말들이 어떤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됐다. 말이 인격을 나타낸다는 문장은 고루한 격언으로 받아들였을 뿐 자신에게 적용시켜 본 적이 없다.
그저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사는 이들을 부러워하며 비관적인 말로 내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게 습관이었다.
자조적인 언어에서 반짝이는 결실이 있을 리 없다. 어제까지 갖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이 한 번의 결심으로 바뀌는 건 어렵겠지만, 나의 한마디가 자신을 죽이고, 주변에 부정적인 기운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심코 던진 말이 곧 나를 의미하며 내 안에 무엇을 담을지에 대한 선택은 자신에게 있다.
우아하게 살고 싶어
요즘은 평범한 사람들의 브이로그를 챙겨 본다.
얼굴도 모르는 그들의 일과를 시청하는 건 왜일까.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열심히 일하고 잘 챙겨 먹으며 좋아하는 것들로 삶을 채워간다. 귀찮아서 지나칠 수 있는 부분도 세세하게 신경 쓰는 모습.
그런 태도를 보며 자신을 대접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일과를 나름의 방식으로 바지런히 꾸려가는 게 우아하게 느껴진다. 이들의 영상을 보면 나 또한 의욕적으로 생활을 꾸려가고 싶은 욕구가 인다.
(나에게는 터틀이주미 채널이 그렇다)
나의 행복에 집중하기
내가 만든 행복의 조건은,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현재를 부정하고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이 무력감이 나를 회의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다.
미래에 유명한 작가가 된다면, 경제적인 안정을 이룬다면, 좀 더 나은 집에서 산다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믿음은 불안정한 현재를 견딜 유일한 힘이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늘 지금보다 충만하고 그럴듯했다.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을 뿐 나는 내 힘으로 행복해지려는 의지와 노력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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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불행은 미래의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다. 그 불행은 내 몫이며 걱정과 근심도 셀프로 처리해야 한다.
회의적으로 세상을 보는 내겐 오지 않은 미래보다 오늘의 행복과 만족이 중요했다.
미래의 막연한 행복을 꿈꾸는 것을 멈추고, 살아 있는 오늘 하루를 뿌듯한 기분으로 마무리하고 싶었다.
내 곁에는 나를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있고, 하루를 견고하게 쌓아갈 수 있는 나만의 루틴과 즐거움이 있으므로 오늘의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자신감의 토대가 된 것은 시선을 외부가 아닌 내부로 돌린 작은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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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바깥이 아닌 내 안에서 독립적으로 이루어야 한다.
내실 있게 행복해지려면 먼저 마음이 필사적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작은 만족을 이룰 수 있는 힘이 생기면 그 힘이 모여 크고 작은 행복을 만들고 느끼는 기민한 감각이 발달한다. (느껴보고 싶다)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열심히 썼는데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속상해요. 계속 쓴다고 나아질까요?"
"실패를 고민할 게 아니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 작가가 자기 글에 애정이 없는데 독자들이 좋아할 리 없지."
자신의 부족한 점은 잘도 짚어내면서 장점을 찾아내는 데는 재능이 없는 나를 정확히 찌르는 말이었다.
내가 먼저 나의 작품을 아끼고 사랑할 때 타인의 평가에 휘둘리거나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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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자신조차 반하지 못한 글에 외부의 평가가 호의적이기를 바란 건 욕심이었다.
자신을 존중하고 스스로에게 애정을 보낼 때 타인도 나를, 내가 쓴 글을 사랑할 수 있다.
그들의 평가가 작품을 규정짓는 전부가 되지 않으며, 내가 반성해야 할 것은 내 글에 대한 애정을 갖지 못한 나의 인색한 태도였다.
대체되기 어려운 볼트가 된다는 것
직장인으로 살다 보면 고민에 휩싸일 때가 있다. 내가 하는 일이 과연 전문성을 띠는 일인가, 발전 가능성과 성장 동력을 갖춘 일인가 하는 원론적 고민.
회사에서 자아실현을 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내적 성장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통해 이뤄나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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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는 맞춤 정장처럼 내 적성과 성격에 꼭 맞는 맞춤 직업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난 스스로를 글을 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 여겼다. 그런 믿음이 있었을 땐 생계를 위해 시작한 학원 강사나 마케터, 콘텐츠 디자이너 등의 일을 꿈이라는 목적지로 가기 전 잠깐 스치는 일 정도로 치부했다.
열정과 의욕 없이 계약서에 상정된 근무 시간을 적당히 채우는 '월급 루팡'이 되길 자처한 셈이다. (지금 내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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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자아실현이나 내적 성장은 아니더라도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마음, 업무의 즐거움을 찾고 나니 의욕적으로 일과 생활을 병행할 힘이 생겼다.
이 변화만으로도 난 충분히 사회에서 오래 버틸 만한 단단한 볼트가 된 게 아닐까 싶다.
삶이 엉망이라고 느낄 땐 청소를
공간 디렉터 최고요 작가가 쓴 <좋아하는 곳에 살고 있나요?>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에서 작가는 인테리어가 단순히 공간을 꾸미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삶을 가꾸는 방식임을 말해준다.
집을 가꾼다는 것이 곧 우리의 생활을 돌본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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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내가 사는 공간을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좋은 집에 살 거라며 허황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머무는 공간을 사랑스럽게 바꾸고 싶다는 의지가 솟았다.
공간의 분리, 마음의 분리
자존감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마음을 돌볼 수 있는 나만의 공간도 필요한 법, 화살처럼 꽂히는 아픈 말들, 눈치 보는 마음, 남과의 비교로 끝없이 추락하는 자신감.
이 모든 감정들이 무분별하게 침입하는 건 마음의 공간이 외부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타인을 받아들이는 마음과 내 감정을 지키는 자존감이 적절히 균형을 이뤄야 하는데, 그 경계선을 지키는 마음의 파티션이 나에겐 없었다.
마음의 가벽이 있다면, 사람들과 부딪혀 상처받더라도 그 감정이 마음 전체를 지배하여 삶의 무기력과 의욕 저하로까지 이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친밀감의 척도
관계의 깊이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해 생각하는 요즘,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는 친한 친구에게 '난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는데, 넌 힘든 사정을 왜 말하지 않느냐'라고 투정을 부렸던 유치한 감정이 떠올랐다.
누구에게나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는 법인데, 상대의 내면 깊은 곳까지 길어내려 했던 건 나만의 욕심이다.
혼자만의 감상에 젖어 직장 동료 사이의 선을 넘은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어쩌면 전 부장 선생님은 내게 거리를 둔 게 아니라 적정 거리를 지킨 것이었는지 모른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이 부분이 가장 고민이긴 하다. 아직도 잘 감이 안 온다. 단순히 '마음의 온도를 낮추니 상대방의 온도와 맞는구나'라는 결론 밖에 얻지 못한 상황이다)
나를 지탱했던 우정
내 삶이 뿌리 깊게 서지 못하면 관계를 맺기 어렵고 섬약하게 흔들린다.
삶의 결핍과 불만족을 느낄 땐 마음 그릇에 누구도 담을 수 없으므로 시간적, 공간적 분리를 의식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혼자여도 충분한 시간 안에서 삶을 단련하고 안정을 찾았을 때에야 비로소 타인을 받아들일 수 있다.
번잡한 감정과 불안을 충분히 닦아낸 후 M을 만난다면 이 불편함도 해솔될까, 또는 한때 좋았던 M의 무신경함은 나를 따뜻하게 덥펴준 한철로 지나가고 그 인연은 자연스레 페이드 아웃될 수도 있다.
인생 어느 시기마다 나를 지탱했던 만남들이 있었다. 그 만남의 힘으로 지금의 내가 여기에 뿌리를 내려 살아가는 것이리라.
M은 분명 내 삶이 세상에 강건하게 뿌리내리는 데 좋은 역할을 해준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므로 오랜 시간 함께해준 M에 대한 고마움은 유효하다. 내가 동경했던 앤과 다이애나의 평생 우정을 그녀와 실현시킬 수 없다 해도 그 한철의 우정은 나의 삶에 큰 의미로 남아 있을 것이다. (시절인연일지라도, 그 친구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주는 데 많은 보탬이 되었다. 고마움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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